국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화가 또다시 미뤄질 위기다. 올해 상반기까지 구체적인 로드맵을 내놓겠다던 금융당국은 최근 ESG 규제에 적극적이던 주요국 기조가 달라졌다며 ‘신중론’을 펴고 있다. 시민사회는 금융당국이 해외 사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로드맵 발표 앞두고 ‘신중론’ 펴는 금융위
ESG 공시는 기업의 탄소배출량 등 ESG 관련 지표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는 제도다. 당초 금융위원회는 2025년부터 자산 2조원 이상 상장기업을 시작으로 ESG 공시 의무화에 나서겠다고 발표했으나, 기업 반발에 부딪혀 시행 시점을 ‘2026년 이후’로 미뤘다. 이에 따라 로드맵 발표 시점도 2023년 3분기에서 올해 상반기로 연기됐다.
하지만 로드맵 공개 시점이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까지도 여전히 공시 시기나 대상, 범위는 불투명하다. 금융위는 ESG 공시 의무화 시점을 더 늦출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한국보다 ESG 공시에 적극적이었던 유럽연합(EU)과 미국 등에서 규제 완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지난달 23일 열린 ESG 추진단 제5차 회의에서 “EU를 비롯한 국제 사회에서 ESG 공시 논의가 진전되고 있지만 여전히 변동 가능성이 있다”며 “한국은 제조업 비중이 높은 산업구조를 고려해 주요국 동향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EU는 지속가능성정보 공시지침(CSRD)를 제정하고 올해부터 의무 공시를 진행 중이지만, 최근 공시 대상을 일부 축소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2월 말 ESG 규제를 완화하는 ‘옴니버스 패키지’를 발표하고, 임직원 수 1000명 이하 기업을 공시 대상에서 제외했다. 비상장 대기업의 공시 시점도 2026년에서 2028년으로 2년 유예했다.
영국, 미국, 캐나다 등 주요국에서도 ESG 공시 제도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게 금융위 설명이다. 일본은 2027년부터 프라임시장 상장기업 중 시가총액 3조엔 이상 기업부터 공시를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금융위는 이 역시 확정은 아니라고 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 로드맵을 발표하기로 한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영국과 일본이 올 1분기 내 기준을 확정할 것으로 예상했다”면서도 “국회 입법이나 국무회의 의결 등 절차가 남아 있어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라고 했다. 기업 부담 등이 큰 만큼 다른 나라보다 앞서 제도화에 나서는 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해외 사례 편향적 해석” 비판
기후·환경단체들은 금융위가 해외 사례를 편향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융위가 신중론의 근거로 제시한 사례들은 ESG 규제 취지를 부정한다기보다 실제 도입 과정에서 나온 보완책에 가깝다는 것이다.
녹색전환연구소에 따르면 ‘옴니버스 패키지’는 EU 집행위의 핵심 정책인 ‘청정산업딜’과 함께 발표됐다. 청정산업딜은 EU의 높은 에너지 비용 부담을 완화하고 탈탄소화에 명확한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해 청정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전략이다.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부소장은 “EU는 고탄소 기업을 대부분 오프쇼어링(역외 이전)하고, 역내 기업의 청정산업 전환은 적극 지원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며 “청정산업 전환에 나선 기업에 공시 등 행정부담까지 지우는 건 과도하다고 보고 이를 완화한 것이 옴니버스 패키지 취지”라고 말했다. 이어 “산업구조 전환은 하지 않으면서 공시기준도 ‘남들 하는 걸 다 보고 정하겠다’는 한국 정부와는 접근 자체가 다르다”고 했다.
ESG 공시에 발 빠르게 나서는 경쟁국 사례도 적지 않다. 일본은 지난 3월 최종 공시기준을 발표하며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 권고안을 대부분 반영했다. 스코프3(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한 탄소배출량) 공시 의무도 ISSB 권고에 따라 도입 첫 해에만 유예하기로 했다. ‘금융 허브’를 지향하는 홍콩도 내년부터 상장기업 대상 기후 공시를 의무화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상태다.
반면 한국 정부는 아직 세부 일정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EU의 역외 기업 공시가 의무화되는 2029년 이후로 국내 도입 시점을 미루자는 재계 요구를 당국이 사실상 수용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수석연구원은 “기업에 가장 큰 부담은 불확실성”이라며 “당국이 미온적 태도를 보이면 ESG 조직·인력 확충에 나섰던 기업들의 대응 동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후 싱크탱크 E3G의 최근 설문조사에서도 한국의 ‘눈치보기 행정’이 문제라는 점이 확인됐다. 전 세계 중견 및 대기업 경영진 15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한국 응답자(105명) 중 42%는 “명확한 전환 일정 부재가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을 저해하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한국은 제조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8%로, 미국(10.7%)이나 영국(8.3%) 등보다 높은 편이다. 중소기업도 많고 공급망 구조도 복잡해 탄소 배출량 계산이 쉽지 않다. 다른 나라보다 비슷하거나 늦게 ESG 공시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들의 대응 여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김 수석연구원은 “정부가 공시 의무화 시점을 늦추더라도 해외 고객사나 투자자는 배출량 계산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며 “정부가 국제기준에 맞는 공시 체계를 빨리 도입하지 않으면 기업 입장에서는 국내외 기준 사이에서 이중 부담을 떠안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